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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의미를 되새기게 되고 그때 민주주의를 사수하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지금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도에도 또 한 번의 국민들의 목소리가 광화문에서 널리 퍼졌었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었습니다. 

그해 무슨일이?

1987년 1월 14일 12시 30분 의사와 간호사를 태운 한대의 구급차가 해양연구소로 들어옵니다. 이미 사망한 사람을 살려내라는 말에 의사는 최선을 다해 살리려고 해 보지만 결국 살려내지 못합니다 박처장이 해양연구소로 옵니다. 시신을 태우라고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을 합니다. 박처장의 부하들은 검사를 찾아가 거류에 도장 하나만 찍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서류를 의심스러워하며 부검을 해서 사인이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위에서 시킨 일이라며 그냥 순순히 도장을 찍어서 마무리하라고 여기저기서 압박해 옵니다. 검사는 화가 나 종이를 꺼내 시신보존 명령을 적고 도장까지 찍습니다. 며칠 후 공안 4 과장 이검사의 방에 기자가 오고 기자에게 슬쩍 박종철학생의 희생을 알립니다. 서울지검에 박종철학생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되고 그 기사를 본 박 차장 부하들이 들이닥쳐 보도국을 박살 내게 됩니다. 그 당시 보도지침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라 일에 방해되는 것을 기사로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커지자 치안본부장실로 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하게 됩니다. 학생이 어떻게 죽었냐고 기자가 묻자 청장이 뜸을 들이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박 차장이 학생이 겁에 잔뜩질려 조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쓰러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자들이 20대 청년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니 말이 안된다며 진단한 의사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자 얼떨결에 오윤상의사라는 이야기를 하게됩니다. 기자들은 모두 의사를 찾으러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한양대 병원에서는 부검이 이루어지게 되고 희생된 학생의 부모와 누나가 시신을 보기 위해 병원으로 오지만 경찰들이 막아서면서 폭행도 서스름없이 하며 가족들을 제지하며 부검도 못하도록 막습니다. 이 광경을 최검사가 목격하고 한탄해하며 박부장에게 전화를 하게 되고 이북말투부터 고치라며 약을 올립니다. 최검사는 박부장을 만나 먼친척이 미국 기자와 결혼했으며 이 사실을 알면 88올림픽에 차질이 생길수있으며 이를 각하가 알면 좋아하실거 같냐고 협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박부장은 실컷 물어 뜯어보라며 최검사의 말을 무시하고 갑니다. 윤상삼기자는 한양대 병원으로 들어오는데 물고문 했냐고 물어보자 경찰에게 제지 당하며 맞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신문에 실어야 한다며 상부에 이야기하는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 보도지침을 깨고 모두다 신문에 실으라고 합니다. 최검사는 검사를 그만두고 물건을 챙겨 나오다 윤상삼기자를 만나게 되고 기자가 볼수있게 황박사의 검안서가든 박스를 놓고 갑니다. 검안서는 동아일보에 그대로 실리게 됩니다.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고 발등에 불떨어진 박차장은 꼬리 자르기를 하기위해 밑에 있는 부하 두명을 감방에 보냅니다. 박차장만 믿고 있던 부하는 뭔가 잘못됨을 알고 검사에게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자 박차장이 나타나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게 되고 부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받들겠다며 충성을 다짐합니다.

 

지금 우리는...

6월 항쟁과 박종철사건을 제대로 그린영화 '1987'입니다. 한 청년의 허무한 죽음과 청년의 죽음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부당함에 끔찍함과 치를 떨었던 사람들이 이 일을 만천하에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검사도 나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막지는 못했습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의사 또한 최선을 다해 진실을 전했으며 부검의사도 정의에 한걸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날의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당함에 맞섰고, 진실을 외치고 사실을 말했습니다. 모두의 노력과 희생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역사를 더 자세히 공부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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